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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계수련에서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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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고 버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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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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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세카'가 얘기하는 깨달음
  9. 2008/04/17
    내면을 지향하기
  10. 2008/04/17
    영적 성숙
수선재에서 퍼왔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일까요? 깨닫는다는 것은 ‘안다는 것’입니다. 다른 엄청난 것이 깨달음이 아니라 우주를 움직이는 법칙을 알았다는 얘기입니다. ‘우주가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줄 알았더니 하나의 어떤 질서에 의해서 움직이더라’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인간들의 행동이나 인간사회의 모습이 우연인 것 같고, 억울한 희생자도 많은 것 같고, 중구난방인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까 어떤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한테 닥치는 일도 모르지만 또 사회적으로 전체적으로 닥치는 일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그 모든 사태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모르니까 과학적으로 규명을 하기도 합니다. 가뭄이 몇 년 이상 계속되면 어떻게 되더라, 어떤 전염병이 나오더라, 하는 걸 과학적으로 규명을 합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란 과학적으로는 몰라도 그냥 아는 것입니다. 왜 계속 가문지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지식 없이 지혜로 알아지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깨달으면 일단 삶이 달라집니다. 사는 것과 살아지는 것의 차이를 아십니까? ‘산다’는 것은 자신의 의사가 개입된 적극적인 행동이고, ‘살아진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왜 그리고 어떻게 삶이 달라지는가? 깨달으면 첫 번째로 앎이 생깁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아는가? 우선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뭘 하던 사람인지, 뭘 해야 하는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이런 자신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됩니다. 자신이 떠나 온 곳이 어디인지, 앞으로 가야 할 곳이, 지금 어떤 시점에 있는지 알게 됩니다. 시작과 끝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이탈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항해를 할 때 떠난 곳이 분명하고 갈 곳이 분명하면 표류를 안 하잖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분명치 않으면 망망대해에 떠서 표류하다가 좌초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사는 것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살아지는 것입니다.

또 세상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공부를 굉장히 많은 밑천을 들여가면서 어렵게 하지요.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여가면서 어렵게 세상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공부를 해서 세상을 다 알았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상의 겉모습은 알 수 있을지언정 세상이 어떤 원리와 구조에 의해서 돌아가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우주의 일원이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인간 세상의 일원일 뿐 아니라 우주의 일원으로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나에 대해 알고, 세상에 대해 알고, 또 우주에 대해 알면 그 때는 도리를 알게 됩니다. 인간의 도리, 세상의 도리, 우주의 도리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도리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인간적인 도리와는 좀 다릅니다. 우주의 도리는 따로 습득을 해야 됩니다.

깨달으면 두 번째로 사랑이 생깁니다. 이때의 사랑은 우주의 사랑입니다. 『선계에 가고 싶다』를 보면 우주의 사랑이 어떻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사랑, 인간들이 말하는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너와 내가 하나라는 것, 같은 운명체라는 것, 한 나무의 같은 뿌리로부터 나온 열매라는 것, 이런 것을 알 때 진정으로 타인을 궁휼히 여기는 그런 사랑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모르면 그 때는 사랑이라고 하지 않고 정(情)이라고 부릅니다. 정은 본능적인 것이지만 사랑은 승화된 감정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생기면 같은 생명체를 사랑하게 되고, 또 같은 생명체가 아니더라도 자연을 사랑하게 되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됩니다.

깨달으면 세 번째로 자신이 아는 것, 사랑하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아는데 그치지 않고, 또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고, 알고 사랑하는 것을 끝내 실천할 수 있는 의지력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하단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데 일단 깨닫고 나면 다시 아래로 내려갑니다. 상단에서 앎이 시작되어, 중단에서 사랑이 싹트고, 다시 하단의 의지로써 자신의 사명을 이뤄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보통 삶과는 다르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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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님 거듭나기에서 퍼왔습니다.

여러분, <죽이고 버림>이란 참으로 똑바르고 훌륭한 공부법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진짜 제대로 죽이고 버리는 법을 모르십니다. 진짜 제대로 죽이고 버리는 법이란 뭐냐?

그것은 생각으로 죽이고 버리고 무엇을 폭파하고 용광로에 녹이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수행의 아주 초창기에 아상과 에고로 똘똘 뭉친 사람들에게나 잠시 하는 것입니다. 진짜 제대로 죽이고 버린다는 것은 그렇게 죽이고 버려 깨달음이라는 무언가를 얻겠다는 것, <바로 그 생각> 자체가 욕심이요, 번뇌망상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번뇌망상을 버리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미 부처가 금강경에서 <진정한 법이란 얻을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 하지 않습니까? 석가께서 아난에게 <내가 법이란 것을 얻은 바가 있느냐?> 하고 반문하지 않으셨습니까? 진리는 이처럼 모든것(나, 진리, 스승, 법, 구도심)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깨달음이란 <생각>으로는 번뇌만 지을 뿐 실제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으며, 진리의 그 자리는 생각이 끊어지고 내려 놓아진 생각 이전의 본래의 자리란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제 아무리 훌륭한 <생각>이나 <수행 방법>일지라도 그것은 진리 입장에서 보면 다 <생각>이고 <有爲>라서 일체가 다 번뇌망상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가 구원을 얻겠다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종교에 매여 지내며, 내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 하나에 매여 평생을 남의 노예가 되어 헛된 형상에 머리를 조아리며 돈과 몸의 수고를 갖다 바치는 것입니다. 참, 머리가 나쁘면 평생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진리란 말이 다만 <진리>일 뿐, 진짜로는 이것만이 진리다랄 게 없습니다. 아니 없다 해도 틀리고 있다 해도 틀립니다. 왜냐하면 참 진리란 있고 없고, 얻고 잃고 이런 분별망상심(양변에 떨어진 생각)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체의 생각을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애꿎은 내 몸이나 생각을 그만 죽이고 버리십시오. 그리고 다만 할일은 모든 생각을 조용히 내려 놓는 것입니다. 어디로 갈 바도 없으며 어디에 머무를 바도 없습니다. 전체가 하나요, 한 마음이요, 나이며 너이며 일체입니다.

그 속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 자꾸 이런 저런 분별망상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부 찾아 어디로 떠난다든지 하는 것이 일체 몽땅 헛짓이라 이 말입니다. 그 생각을 내려 놓는 것이 참으로 자신을 죽이고 버리는 것입니다. <죽이고 버림>에 매이고 걸려들어 그것을 스스로 죽이고 버리지 못하니 계속해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를 하지만 그 실상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알려줘야 하는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본인만 수고로울 수밖에요. 진리는 <있는 그대로>가 진리입니다. 아니, <있는.... >이라 할 때 이미 벌써 그것도 분별망상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생각만 시작하면 이미 개구즉착이라!

일체가 다 마음인데, 일체가 다 위대한 우주 한 생명의  에너지 속 움직임인데 뭐가 따로 있고 말고입니까? 다 우리가 분별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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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통의 기원은 오로지 개별성의 환상입니다. 사람이 우주이고, 완전하며, 있는 전부(All That Is)와 하나이고, 끝없이 영원하다는 것을 각성할 때, 더 이상의 고통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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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약 모두가 항상 서로를 사랑하고, 모두가 항상 서로에게 감사하는 천국에서 살고 있다면, 어떻게 의식의 진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우린 부정적인 사람들을 만난 덕분에 자기 내면의 부정성을 끌어올려서 내맡길 수 있습니다. 지상에 태어난 것은 정말 큰 기회입니다. 이런 기회를 갖게 된 것에 감사하십시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천사'든 '악마'든 우리는 그에 대해 여기 있어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뿐입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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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하고 있는 그 어떤 대상이 아니라 의식 자체와 동일시하십시오. 그것이 참나에 이르는 빠른 길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곧바로 문을 통과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행입니다. 거기에는 알아야 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혹은 기억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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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도달하여 환영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는 '내가 행위자'라는 느낌을 갖지 말고 '나는 신의 도구'라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스스로 속아서 '내가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있다. 저 사람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나는 그를 도울 수 있다. 저 사람보다 내가 낫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라.

그 사람 내면에 있는 신을 섬긴다는 자세로 돕도록 하라. 이런 모든 섬김은 그대의 참자아를 향한 것이다. 결코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을 돕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행복하고, 똑같이 부유하고, 똑같이 현명하고, 똑같이 건강할 때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행복, 부유, 현명, 건강 같은 말 자체가 그렇지 못한 것이 있어야 성립되는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보다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체 지나치라는 뜻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대 자신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할 때, 그 노력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대는 영적으로 진화하게 된다.

특히 '내가 하고 있다'는 이기적인 느낌을 배제하고, '나를 통해서 신이 하고 있다. 신이 행위자이고 나는 도구일 뿐'이라는 마음으로 할 때 더욱 높이 진화한다. 모두가 다 자신의 참자아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든 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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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Q, 호킨스 박사 H로 표기

Q : “오늘 박사님께서는 물질적 세계를 하나의 환상, 놀이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이 세상은 배우기 위해 경험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H : “아니오, 나는 물질적 세계를 환상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환상적인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지각입니다. 세상을 어떻게 지각하느냐, 환상적인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물질적 세계의 존재는 환상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친절하다, 잔인하다, 재앙이다, 축복이다.... 등으로 지각하지요. 사람이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은 주관적입니다.”

Q : “알겠습니다. 저의 질문은.... 우리가 하나라면, 우리가 동일하다면, 우리의 물질적 실상, 우리의 육체에는 어떤 까닭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H : “그것은 다른 수준의 추상(abstraction)들입니다. 당신은 수준을 혼동하고 있군요. ‘하나임’은 맥락에 관한 것입니다. 물질성에 관한 것이 아니지요.

Q : 하나가 여럿으로 출현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하나임은 다수의 표현을 통해 출현하고 있습니다. 동물계와 식물계 전체... 비록 이들은 물질성에 있어서는 여럿이지만 생명의 근원에서는 하나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 속에서 생명의 근원은 하나입니다. 하지만 형상(form), 형상은 여럿인 다양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H : “.... 그러면 물질에는 어떤 까닭이 있는 것이지요?”

Q : “세상은 그런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이 부여하는 거예요.”

H :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요?”

Q :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그것은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거예요. 세계는 그냥 있는 겁니다. 그 무엇을 위해 있는 게 아니예요.”

H : “감사합니다...”

Q : “지금 내가 마무리하고 있는 책에서는, 당신이 지금 세계에 투사할 수 있는 서른 다섯가지 다른 의미들의 선택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폭소) 세상은 정신병원이다, 세상은 회복이다, 세상은 농담이다, 세상은 비극이다, 세상은 그림자이다, 세상의 목적은 구원이다, 세상은 연옥이다, 세상은 코미디이다, 세상은 슬픔이다... 등.

당신은 이러한 투사들로 세상을 만듭니다. 세상의 의미는 그 모든 것이기도 하고, 그중 어느 것도 아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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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지금 당장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아무 문제도 없다. 그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어라.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라. 지금하라. 할 수 있다. 하라.

그대는 그대가 믿는 바로 그 사람이다. 만일 그대가 구속되어 있다고 믿으면 그대는 구속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자유롭다고 믿으면 그대는 자유롭다. 그러므로 그대가 자유롭다고 선언하라. 그대가 자유롭다고 선언하라. 그것이 전부이다. 이 일은 그처럼 단순하다. 대담해지라. 지붕 꼭대기에서 그대가 자유롭다고 외치라.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내가 고쳐 주겠다. 우선 그대는 없앤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음에 남은 낡은 습관에 대해서는 오늘 아침 사트상에서 이미 설명했다. 감각에 의해 대상을 왜곡해서 이해하는 행위가 마음의 낡은 습관이다. 그러한 습관을 없앤다면 그대는 마음에서 벗어나 자유가 된다.

그러나 마두카르, 그대는 이미 이러한 습관을 없애 버렸다. 자유에 대한 욕망은 그 자체가 불길이다. 자유에 대한 욕망이 그러한 낡은 습관을 모두 불태웠다. 이제 그런 습관은 되돌아 올수 없다. 그 불길은 산불만큼 강렬하다. 그 불길은 모든 습관과 욕망을 불사른다. 파괴의 예식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대가 말하는 횃불은 지혜의 근원이다. 그것은 불이며 빛이다. 빛의 근원이다. 낡은 습관은 이미 없어져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 결과는 지혜이며 자유다. 그대는 없애야 할 것이 없다.

생각이 오게 하라. 생각이나 마음과 투쟁하지 말라. 오게 하라. 생각은 그대와 놀고 싶어서 온다. 파괴를 위해 오는 것이 아니다. 생각들을 파괴하지 말라 어차피 그것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마음은 마음이 없는 상태로 변했다. 그리고 마음이 없는 상태는 자유이며, 자유는 지혜이다. 이것이 햇불이다. 그 햇불이 알아서 할 것이다. 그대의 낡은 습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그대는 매우 잘 놀고 있다. 아무 해도 없다 그대는 왕국으로 돌아와 자유의 옥좌에 앉았다. 이제 누구도 그대를 구속할 수 없다. 전에 그대는 백성중의 하나였고 그 나라의 법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이제는 그대가 법이다. 신들도 그대에게 경배를 드릴 것이다. 세상은 그대의 것이다. 그대의 소유인 이 세상은 아름답다.

이 세상은 깨달은 이들의 즐거움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이 땅은 고통으로 가득한 묘지와도 같다. 투쟁하지 말라.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그대는 새로워졌다. 그대는 젋음을 되찾았다. 그대를 만나는 사람은 행복을 느낄 것이다. 그들은 그대에게 입맞추고 함께 놀기 위해 그대에게 다가온다.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자아는 사라졌다. 무지와 어둠도 끝이 났다.

과거의 습관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들은 상상일 뿐이다. 윤회도 신도 모두 상상이다. 우리가 말하는 “나“라는 것 역시 상상이다. 그대는 나라는 것을 상상한다. 그리고 상상속의 “나”라는 것이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을 상상한다. 신과 신의 세상을 상상한다. 모든 것은 그저 상상일뿐이다. 사람, 언어, 천국, 고통과 즐거움도 상상이다. 자유와 구속도 상상이다.

수갑도 쇠고랑도 없지만 그대는 자신이 구속되었다고 상상한다. 어떤 이들은 꿈속에서 수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고통받는다. 꿈에서 깨어나야만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 지혜가 없는 한 모든 이들은 수갑을 차고 쇠고랑에 묶여 있다.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다. "나“라는 것은 거대한 벽이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그대가 깨어나지 못하는 꿈일 뿐이다. 우리는 “나”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라는 생각에서 놓여나야 한다. 그러나 그 벗어남 역시 하나의 상상이다. 구속이 상상이었듯 자유도 상상이다. 깨어남도 축복도 모두 상상이다. 이것이 지혜이다.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리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습관은 바보들의 사전에 실려 있는 낡은 언어이다. 현명한 사람은 사전이 없다. 그는 읽을 필요도, 연구할 필요도 없다. 연구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지혜는 어떤 것에도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 정해진 개념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

개념화된 개념을 없애버리라. 이것을 이해하라! 개념이 없는데 낡은 습관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자유이다. 진정한 스승은 그대가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스승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진정한 스승은 자신도, 그리고 그대들도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진정한 스승에게는 가르침이 없다. 그대들은 이미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미 자유로운데 어떤 가르침이 필요하겠는가? 육체와 마음과 감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육체를 가르치겠는가? 육체는 공허하고 감각도 공허하고 마음도 공허하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는가?

이 일은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어쩌다 우연히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이 일은 일어나야 했고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느낀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라. 나는 이 일이 어쩌다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고유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대가 어디에 가든지 그대에게 최고의 행운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나는 사트상에 함께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대의 행운을 빈다.

우리는 그대에게 행운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그대는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떠날 수 없다. 그대의 육체는 어디에든 갈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떠나지 않는다. 어떻게 그대가 떠날 수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을 기뻐하고 있다.

나는 그대가 떠나는 것이 좋다. 모든 것을 떠나라! 어느 날 그대는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떠날 것이다. 육체를 지닌 채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야 한다. 친척들을 떠나고, 그의 육체를 떠나야 한다. 모든 것을 떠나야 한다.

그런 일은 일찍 일어날수록 좋다. 왜 내일을 기다리는가? 내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그대가 내딛는 신뢰에 가득찬 이 발걸음에 행복을 느낀다. 그것은 신의 선물이다. 그렇게 나아가라. 그대에게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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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는 부정적인 감정들에서 단물을 빱니다. 사람들은 왜 부정적인 감정을 좋아하는 걸까요? 그것은 에고가 부정적인 감정에서 그토록 많은 단물을 빨아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화내는 걸 사랑하고 피해자로 있는 걸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길은 자신의 에고가 그런 것을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입니다. 에고는 자신에 대해 안됐다고 느끼는 걸 사랑하고, 질투하고, 화내고, 피해를 입었다고 느끼는 것을 사랑합니다. 에고는 죄책감에 흠뻑 젖어있는 걸 좋아합니다. 거기에는 은밀한 보상이 있지요. 거기서 벗어나는 비결은 그러한 은밀한 보상을 식별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화내고, 원망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부정성에서 빨아내는 단물을 기꺼이 놓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에고가 거기서 어떤 단물을 빨든,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그뿐입니다.



※출전 ; 호킨스 박사 한국 홈페이지, '인식과의 대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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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최상의 것이 됨으로써 우리는 자동적으로 인류를 위해 봉사합니다. 우리가 되는 그것으로써(by that which we have become) 사람들을 감화시킨다는 것의 살아있는 표본(a living example)과 살아있는 증명(living demonstration)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이 아닌 우리가 소리 없이 되는 그것으로써 감화시킵니다. 소리 없는 그것에는 어떠한 방어도 있을 수 없습니다.

호킨스 박사 강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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